성경에는 주님께서 소경이라고 부르신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다 (계 3:17)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을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들도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소경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인데 왜 주님은 이들도 눈이 멀었다고 하셨을까?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의 눈’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인간에겐 육의 눈, 혼의 눈, 영의 눈의 세 종류의 눈이 있다. 육의 눈으로는 물질 세계를 보고, 혼의 눈으로는 육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내적인 가치들을 보고, 영의 눈으로는 혼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본다.

육신의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혼의 눈으로 보고, 혼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혼의 눈만 가지고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오직 영적 눈이 열려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같은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영의 눈이 열려야만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인 영적 존재로 볼 수 있다.

영의 눈은 새로 거듭난 속사람의 눈이다. 속사람의 눈이 밝아져야 우리는 이 땅에서 새사람으로 사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신자는 영의 눈으로 영적인 실상을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현실적 삶과 영원한 삶을 동시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영의 눈이 어둡다는 것은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머리로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셨어도 그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는 성경 지식이 될 뿐이다.

두려운 것은 영의 눈이 어두우면 영적인 일들을 혼적으로만 이해할뿐, 실제로는 영적 실상을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영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자신들이 실상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믿음이 미지근하고 가난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부요한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7)

이처럼 성경은 자신의 영적 실상을 아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영의 눈이 있어도 어두워서 밝히 보지 못한다면 그 역시도 영적으로 소경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계3:18)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 영적 진리를 밝히 보기를 원하신다.

어떻게 해야 영의 눈이 열려서 밝히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되려면 영과 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영적인 것이고 무엇이 혼적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영적 분별력을 갖는 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우리의 눈에 필요한 안약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영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때 군중들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 그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고 영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으시고 함께 교제하셨다. 그런데 죄로 타락한 인간은 이 영이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주인되셨던 하나님대신 자신의 혼을 주인삼아서 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아’이다.

예수님을 영접했다해도 여전히 내 자아가 주인일때 내 혼이 나의 영과 육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내 영에 계신 성령님께조차 내가 주인노릇을 하는 혼적인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면 자연히 성령을 모신 내 영이 나의 혼과 육을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로 모든 것을 주인되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고 순종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신자인 것이다.

영의 눈이 밝아지려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내 안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바로 ‘자아부인’ 이다. ‘성화’란 이렇게 자아중심의 혼적인 신자에서 하나님 중심의 영적인 신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주인이 ‘자아’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아직 영적으로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눈먼 신자들이 아직도 교회안에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길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영의 눈이 밝아지지 않으면 혼적인 신자로 머물 수 밖에 없고 혼적인 신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 수 밖에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7-8)

영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그래서 영의 눈은 또한 마음의 눈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신자의 정체성과 소명, 또 우리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8-19)

또 영의 눈은 믿음의 눈이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말하는 것이다 (히11:1) 현실에는 없지만 영원한 세계에는 이미 있는 것들을 ‘영의 눈’으로가 아니면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이 영의 눈이 열린 믿음의 사람들만이 성취해 갈 수 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밝히 볼 수 있도록 이 ‘영의 눈’이 밝아지는 축복이 임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글쓴이: 송명선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