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여정은 신약시대의 신자의 영적 생활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신자들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여정속에서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두가지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상처’와 ‘쓴뿌리’이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게 되면 새생명으로 태어난 기쁨과 주님의 사랑과 은혜속에서 마치 신혼시절과 같은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광야에 들어선 자신을 보게 된다. 광야는 영적으로 나의 옛자아가 죽는 곳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환경을 통해, 필요하다면 질병을 통해서도 우리의 옛자아가 완전히 죽을 것을 요구하신다.
신자에게 있어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인데 그 기간은 개인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이 곳에서 평생을 소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여기서 헤메다가 일생을 마치기도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왜냐하면 광야는 척박하고 또 불뱀이 있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의 삶은 신자의 영혼과 육신을 목마르게 하는 곳이며 또한 나의 믿음이 시험을 받는 곳이다. 신앙생활의 승리는 참으로 나의 옛자아가 죽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아부인은 우리의 삶에서 주인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내 삶의 주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내 삶의 운전대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을 말한다.
내목숨과 운명이 남의 손에 달려있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라. 자아부인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모두 예수님의 것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자아부인이 되지않은 사람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또한 자신의 생명, 즉 ‘자아’를 지키려는 자는 영원히 죽을 것이고 자아가 죽은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초신자때는 자아부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이 좀 성장하게 되면 자아부인의 필요성을 알게 되지만, 알았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자아부인은 매일의 삶속에서 육신의 생각과 소욕을 거부하는 믿음과 순종의 선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옛자아가 죽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처’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잘 받고 또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다.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자기연민의 마음은 자신에 대하여 더 집착하게 만든다. 상처로 인해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자기애’ ‘자기연민’ 또 자신을 지나치게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자기방어’ ‘자기보호’는 옛자아를 벗어버리지 못하게하는 올무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자에게 상처를 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이며, 또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그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도록 악착같이 방해하는 것이다.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면서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받은 상처를 잘 치유하고 극복한다면, 우리는 고통당한만큼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 불행이 불행으로 그치지 않고 축복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치유이다. 불행을 잘 극복할때 우리는 주 안에서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쓴뿌리’이다. 많은 신자들이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대물림의 문제들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의 삶은 이렇게 문제가 많을까? 고민하는 분들은 혹시 가계를 통해 내려온 대물림이 있는지, 만일 있다면 어떤 것인지 곰곰히 살펴보아야 한다.
한민족은 몇천년을 걸쳐서 우상숭배를 해온 민족이다. 3,4대를 걸쳐서 예수를 믿은 조상을 가진 신자는 그리 많치 않다. 또 믿음의 몇대손이라 할지라도 그 선조들이 신실하게 믿음의 싸움을 하지 못했다면 그 가계에는 여전히 대물림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십계명중 2계명에서 우상숭배를 할 경우, 그 자손이 3,4대까지 하나님의 보응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5-6) 그만큼 하나님께 우상숭배는 가증한 죄인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음란의 죄를 끊지 못하고, 가족간에 분쟁과 불화가 그치지 않으며, 중독, 정신병, 이혼, 가난, 사고로 인한 죽음, 재난으로 대물림되는 문제들은 영적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혼란과 좌절을 가져다준다. 왜 믿음대로 살 수 없고 왜 믿음이 역사하지 않을까? 자신의 가정에 이미 뿌리를 깊히 내린 죄의 권세앞에서 철저히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한국 기독교는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직도 가계를 통해 ‘대물림’되는 문제들은 강한 죄의 세력으로 신자들과 그 가족들을 가두고 있다. 주님을 영접했고 죄사함을 받은 것을 믿지만 여전히 죄의 세력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를 여전히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붙들어두려는 마귀의 계략을 예수님의 권세와 보혈의 능력으로 깨뜨려서 대물림된 죄로부터 자유해져야 한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십계명의 2계명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대로 대물림된 죄의 권세에 묶여있든지, 아니면 믿음으로 영적싸움을 해서 죄를 끊어버리든지,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사단의 세력과 악한 영들과의 영적싸움은 영적세계의 실상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고 믿을수 없다고 해서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은 영적세계에 대하여 눈을 떠야만 한다. 그리고 마귀가 얼마나 신자들을 미워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는지 깨달아야만 한다. 죄의 권세아래 묶여있다는 것은 아직 옛자아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롬6:6절은 하나님의 자녀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롬6:14절은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6:6-7)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롬6:14)
가계의 대물림을 통해 신자안에 들어온 악한 영은 신자의 의지를 사로잡고 있다. 이런 경우엔 자신의 죄를 회개할뿐 아니라 같은 죄를 범했던 조상의 죄 또한 함께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상이 죄를 범했을때 자신뿐만아니라 그 자녀들까지 해칠수 있게 악한 영에게 합법적인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는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라, 예레미야등 구약의 많은 선진들이 자신의 죄와 함께 조상의 죄를 회개했음을 볼 수 있다. 가계를 통해 반복되고 있는 죄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죄는 세대를 통해 내려갈수록 그 죄의 세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가계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만을 물려주는 가계로 바뀌도록 자신의 가계를 대표하는 거룩한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한다. 한민족은 영적으로 많은 축복을 받은 민족이다. 한민족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은 다른 민족보다 훨씬 월등하다.
그러나 이런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영성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가계를 통해 역사하는 ‘쓴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까닭이다. 옛사람인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처’와 가계의 대물림인 ‘쓴뿌리’를 해결해야만 한다.
글쓴이: 송명선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