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안에는 하나님조차 내 뜻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죄의 본능이 숨어있다. 이 종교성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 또는 헌신의 모습으로 위장되어 자신의 정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본인도 자신속 깊히 그것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한다.

겉만 봐서는 그 사람속에 숨어있는 진짜 의도를 알수가 없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간구하고 기대했던 것들이 자신이 원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때는 자기의 진짜 동기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적이었던만큼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실망과 원망도 큰 것을 보게 된다.

이럴때 어떤 사람은 원망과 불신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조차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면서 심한 죄의식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교묘한 종교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과거에 어떻게 응답받았나를 생각하며, 같은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기 위해 주님앞에 나아간다. 예를 들자면 새벽기도로써 응답받은 사람은 무슨 일에든지 새벽기도만 하면 다 풀린다고 말한다.

또 금식으로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은 무조건 금식할 것을 권한다. 다시말해서 그 문제를 들고 주님앞에 나아가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문제해결만을 위해 과거에 응답받았던 방법을 더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한번도 같은 방법을 쓰신 적이 없다. 왜일까? 만일 하나님이 매번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면, 인간은 문제가 있을때 더 이상 하나님을 추구하지않고 대신에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방법을 의지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역경을 뚫고 나가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그 분의 뜻에만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앞에서 그저 매일 한바퀴씩 돌라는 명령은 인간이 볼때는 비상식적이며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이었다. 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권능으로 적들이 서로 싸워 전멸하게도 하셨고 또 때로는 구체적인 전술로 싸움을 지시하시기도 하셨다.

새벽기도나 금식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귀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것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런 것조차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조종과 통제의 죄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의 뜻을 묻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하여 주님앞에 조용히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여리고 성을 돌듯이 건물이나 땅주위를 도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그 행위자체보다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시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바른 태도이며 분명하게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 분의 음성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태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녀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안에 있는 종교성은 미워하신다.

인간의 죄성중에 가장 교묘한 것이 조종과 통제의 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떼쓰는 것을 보라. 조르기도 했다가 울기도 했다가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또 밥을 먹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부모가 손을 들고 그 소원을 들어주게 만들고야 만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이런 본성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다. 조종과 통제의 영은 흔히 생각하듯이 강압적인 태도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간청하거나 동정심을 유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의 이런 모습들은 웬지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와같은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경험들이 다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더욱 교묘하게 밥을 안 먹는 것은 금식기도로, 조르는 것은 새벽기도, 철야기도로 위장했을 뿐이다.

사극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왕을 섬기는 신하들의 태도가 이런 우리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전하, 통촉하시옵소서!”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왕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는 그들의 교묘한 모습에서, 나는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조차 내뜻대로 조종하려는 우리의 종교성을 볼 수 있었다.

상대를 조종하여 결국엔 내 뜻대로 하도록 통제하는 이 교묘한 종교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발전을 방해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이 성향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촛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내 뜻을 이루는 것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목표가 좋고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또 주님의 때와 그 분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

글쓴이: 송명선 전도사